Update : 2017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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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2006.09.27 ]

[8월19일(토)] 자전거 네 대를 한 칸 짜리 열차에 우겨 넣었다
달린 거리(8/19~8/21) 약100km 왓카나이-아사히카와-후라노


여행 중 생체시계는 놀라운 정확성을 발휘한다. 피곤한 몸에 맥주를 많이 마신 어젯밤, 12시 넘어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음에도 오전 5시 정각에 눈이 떠진다. 6시까지는 왓카나이역에 도착해야만 한다. 오늘은 기차여행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청춘18열차 티켓은 5일 단위로 특정기간에만 이용할 수 있는데 다행히 하루 분을 손에 넣었다.

이 티켓으로 정말 싼 가격에 장거리를 갈 수 있다. 원래 이 티켓은 여권을 새로 만드는 문제로 왓카나이-삿포로로 되돌아오기 위해 힘겹게 산 티켓이었다. 이 티켓으로 오늘 후라노까지 간다. 역에 도착하니 어제 마주쳤던 마코토와 그의 친구 또 다른 자전거 여행자가 각자 자전거를 가방에 넣고 있다. 도합 4대를 한 칸짜리 작은 열차에 우겨 넣었다.

열차는 매우 느리게 달린다. 일본 여행기간 동안 나를 찾아왔던 감정들이 하나, 둘씩 나를 다시 찾아와 창 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간다. 열차가 느리게 달리지 않았다면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열차는 느리게 달리다 못해 어떤 역에서는 무려 50분간 정차하기도 한다. 모든 이들이 청춘18티켓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이 부분이 나에게는 최고의 강점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느리기에 기차 '여행'이다. 자동차만큼 빠르지 않기에, 오히려 훨씬 느리기 때문에 나는 자전거로 여행을 했다.

목적지는 후라노이지만 아사히카와에서 우선 내렸다. 홋카이도 4대 라면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사히카와 라면을 먹기 위해서이다. 관광안내소에서 소개를 받는데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닌,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라면집인지'를 재차 확인하고서야 찾아갔다.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홋카이도에서 먹은 라면 중 제일이다. 아사히카와는 홋카이도에서 삿포로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홋카이도 북부 지역으로 가기 위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도시이며 실제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기에 자전거 여행자로서 방문할 이유가 없다. 나는 라면을 먹음으로써 아사히카와에서 내린 목적을 달성하고 다시 열차에 오른다.

어제 일본 최북단지를 밟는 것으로 내가 목표로 했던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이 끝났다. 남은 한 가지는 홋카이도 중심에서 약간 왼편으로 치우친 곳에 있는 후라노와 비에이라는 지역에 가서 정말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후라노와 비에이는 홋카이도의 대표 관광지이다. 관광지라는 단어 때문에 약간의 의심과 불안함이 들었지만 이 두 지역만큼은 홋카이도에서 만난 여행자 100%가 추천한 곳이다.

후라노역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이다. 잘 곳을 찾아야 하는데 자전거 여행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안내원의 정보에 밤늦게 인적 없는 곳에서 헤매야 했다. 결국 불빛이 많이 보이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야만 하는 상황까지 갔다가 역으로 돌아와 적당히 근처에서 잠을 청한다. 돌아오는길에 우연히 발견한 슈퍼에서 반값세일을 하는지 체크는 기본이다.

[8월20일(일), 8월21일(월)] '한류'의 덕을 톡톡히 보다
달린 거리(8/19~8/21) 약100km 꽃밭 도시 후라노-패치워크 비에이


20일에는 후라노를 돌아보았다. 라벤더로 유명한 곳이나 라벤더는 이미 거의 진 상태다. 7월이 절정인데 벌써 8월이 다 가고 있다. 하지만 라벤더를 볼 수는 있었다. 하이랜드 온천 이란 곳에 가보니 거의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라벤더 꽃밭이 남아있었다. 그 향기 또한 강했고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내가 그곳에 앉아 분위기 잡으며 일기를 쓰는데 사람들이 라벤더를 밀기 시작한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듯이.

이후 꽃밭을 더 보고 싶어 도미타 팜을 찾았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기는 이미 라벤더 꽃밭이 사라지고 없었으나 사루비야 및 여러 색색의 꽃들은 남아 있었다.

이날 밤, 숙소를 찾아 헤매다가 완전히 고립된 지역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져서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갔다. 화장실도 마실 물도 주위에 사람도 없는 숲 속. 곰이 나올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날 밤, 이번 여행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얻게 됐다.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별들을 한없이 보았다. 새벽에 추워서 결국 텐트에서 잤지만 숲 속에서 홀로 느끼는 적막함에 마음을 정화시키며 별빛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햇빛이 어떻게 하늘을 예술작품으로 재창조하는지 그 과정을 보았다. 불과 몇 분간만 허락된 순간을 나는 보았다.

21일, 나는 꽃밭이 보고 싶어 또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각이었는지 문을 열지 않았다.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무료라고 생각했는데 500엔이란 비싼 입장료 때문에 망설였다. 그런데 깃발을 보고 한국에서 왔는지 물어본 직원 아주머니, 갑자기 들떠서 동료들에게 소리친다. '한국사람이래!'

한류의 덕을 톡톡히 봤다. 직원이 가진 무료 입장티켓 및 박카스류의 음료수까지. 정말 느긋하게 아름다운 꽃밭을 즐길 수 있었다.(불과 3일전 바로 이곳에서 한국에서 드라마를 촬영해 갔다고 한다.) 그리고 떠날 때 메론 아이스크림에 찐 옥수수 2개까지 받았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욘사마를 데려와야만 할 것 같다.

언덕마을 비에이는 후라노의 꽃밭과 또 다른 정취가 있는 곳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바늘로 누빈 수수한 천 조각 같은 언덕들이 펼쳐져 있는 곳. 비에이역에서 한 자전거 여행자가 들어오기에 일본어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가방 한쪽에 꽂힌 태극기를 보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더니 그제야 웃음을 짓는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영화배우 최민수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이 청년은 홋카이도를 일주 중이다. 일본에서 내가 만난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한국인 자전거 여행자다.

일명 패치워크(조각천을 이어붙이는 수예)의 길이라는 곳을 달린다. 언덕마을이라는 수식어답게 언덕이 많다. 여기 언덕들은 다른 언덕들과는 달리 서둘러 넘을 대상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다. 돌아보는데 도중에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을 스친듯하여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순간 나를 부르는 외침이 들린다.

"박 상!" 이럴 수가! 그 넓은 홋카이도에서 루모이 하우스에서 만났던 라이더들을 만났다. 내가 티셔츠에 이름을 한글로 써주었던 하야시토모 및 텟페 그리고 나머지 둘은 초면이지만 그 둘은 나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다고 한다. 그들과 이대로 인사만 하고 헤어질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오토바이지만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함께 달렸다. 항상 그들이 먼저 도착하여 한참 쉬고 있으면 혼자 헉헉대며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라도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자 했다.

저녁이 되어 그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 그들은 나와 함께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오늘은 마지막 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홀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들을 보내고 나는 맥주 네 병과 치즈 등을 사서 마을에서 떨어진 인적 없는 깊숙한 공원에 갔다. 구름이 끼어서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을 불빛들을 바라보며 아무도 없는 적막 속에서 나는 홀로 맥주를 들이킨다.

여행이 끝났다.

착잡하다. 아쉽다. 후련하다. 슬프다. 마지막이란 늘 이런 기분인가 보구나. 이별이란 늘 이런 기분인가 보구나.

To. 박세욱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편지를 써본다. 지금은 떠나기 전날이다. 그 동안의 기억들이 나를 배웅하려 기다리고 있다. 내일 나는 당당히 아사히카와 공항에 도착하여 결승 테이프를 끊을 것이다. 이번 여행, 이런 여행...힘들었던 만큼 성장했고 기뻤던 만큼 발전했고 느꼈던 만큼 성숙했다. 퇴보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아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법을 배웠다. 스스로에게, 때론 엄하게 때론 상냥해질 수 있는 길을 달렸다. 수고 많았다.
-2006.8.21-한국에 보낸 엽서-

박세욱,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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