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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면제원칙(Doctrine of Sovereign Immunity) [ 2021.01.31 ]

[뉴스재팬=포사단필]

1. 낯선 용어
지난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한 사건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일본이 12명의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배상해야 된다고 결정했다. 이 판결로 한일관계는 더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었고, 향후 이 판결에 따른 한국과 일본의 대응을 전망하면서 “주권면제원칙”(원칙)이라는 비교적 낯선 법률용어가 등장하였다.

위의 판결에 대해 일본은 원칙을 근거로 국제법을 위반한 이 판결을 결코 받아드릴 수 없다고 밝히고, 한국에게 국제법 위반을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원칙에 따르면 한 국가는 다른 국가 법정에서 피고로 소송의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권국가가 동의하지 않는 한 그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국제관례법으로 인정되어 왔다. 모든 주권국가는 동등하다. “주권”의 개념을 생각하면, 주권국가가 동의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 법원에서 법적 쟁송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2. 국제금융계
금융계 재직 시에 중장기 외화자금의 조달과 차관단대출을 담당했던 실무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금융계에서는 이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처지이므로 자료를 읽는 정도의 내용이겠다.

국제금융계는 19세기 중에는 물론 20세기 전반까지 원칙을 철저하게 존중하여 적용하였다. 자주 거론되는 사례는 1875년 페루의 국채상환 불능에 따라 디폴트(default)가 발생하자 채권자(국채보유자)들이 담보를 압류하려고 시도한 사례이다. 페루는 주요 수출품인 구아노(guano, 조분석)의 수출대금을 국채의 상환담보로 제공했었다. 이에 따라서 채권자들이 런던에 있던 페루 상업대표부에 입금된 구아노 수출대금의 압류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 형평법 법원은 채권자들이 페루를 상대로 제기한 청원(petition)을 페루 정부의 동의가 결여되었기에 원칙을 근거로 각하하였다.¹⁾ 이와 같이 상거래에서도 채권자의 권리보다 원칙이 우위였다. 일부 전문가는 20세기 전반까지 강력히 적용되던 원칙을 절대적 원칙(absolute doctrine of sovereign immunity)²⁾이라고 기술하였다.

3. 함포외교
중남미 제국의 국채 매입에 거액을 투자한 유럽 제국의 채권자들은 원리금 상황 불능으로 디폴트가 발생해도 원칙이 적용되어 채권회수가 어려워지고 다른 효과적인 회수 방법도 없어 곤경에 처하자 자국 정부로 하여금 채무국에 상환을 압박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함포외교(gunboat diplomacy)의 등장 배경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채무국에게서 밀린 빚을 받아내기 위한 유럽 강국들의 군사력 동원은 합리적인 조치로 간주되었다.³⁾

이미 1823년 먼로주의(Monroe Doctrine)를 제창한 미국은 유럽 제국이 국채 상환압박을 빌미로 중남미와 카리브 해 제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자 이를 못 마땅히 지켜보고 있었다.

1899년 베네수엘라의 디폴트에 대응하여 자국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자, 1902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3국이 군사력을 동원하였다. 베네수엘라의 주요 항구를 봉쇄하고 해군 기지를 폭격했을 뿐만 아니라 세관까지 점령한 사태를 목격한 미국이 작심하고 개입하였다. 향후 유럽이 자신의 뒷마당에서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하여 미국이 중남미 제국의 외채문제를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때는 미국이 중남미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집권기였다. 미국은 사반세기(1905~1929) 동안 도미니카, 쿠바, 아이티, 온두라스, 멕시코,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등에 군사행동을 취했거나 재정 통제를 실시하였다.⁴⁾

빚을 받아내기 위하여 함포외교만 펼쳤던 건 아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제국의 외채상환을 거부했다. 1918년 여름에 14개 채권국들은 외채 상환을 압박하기 위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14개국의 침공병력은 180,000 명이었다. 1920년 적군(Red Army)이 승리하여 영토의 통제에 성공함으로써 채권국들의 군사적 협박은 실패하였고, 외교적 노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채권국들은 침략을 통하여 외채상환을 압박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혁명 열기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될 위험을 차단하고자 했다. 일본군은 1922년까지 시베리아에 남아 있었다.⁵⁾

4. 냉전
1950년대에 들어서 미국은 원칙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1945년 종전 후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소련 국영기업들의 원칙 인용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에 좀 더 제한적인 의미의 원칙(a more restrictive theory of Sovereign Immunity)으로 운용하기 위하여 미국 내에서 이루어지거나 미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행위(commercial activities)에는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견해를⁶⁾ 유지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는 1976년에 제정된 외국 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 FISA)으로 제도화되었고, 1978년 영국도 유사한 법(State Immunity Act)을 제정하였다.⁷⁾

이로써 주권국가와 그 대행기관, 국영기업 등에의 대출과 투자 같은 상거래(commercial transactions) 계약서에 원칙의 적용을 면제한다(waiver of sovereign immunity)는 조항이 명시되면서 당연히 채권자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우리말의 어감으로 볼 때, 원칙의 적용을 ‘면제’한다기보다는 적용을 ‘포기’한다는 표기가 더 정확하지 싶다. ‘면제’는 마치 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해준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채무자는 돈을 꿔가야 하는 아쉬운 처지이다. 어려움 없이 꿔가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없이 원칙의 적용을 면제해야 되기 때문에 ‘포기’라는 표기가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1960년대부터 선진 채권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은 급격히 감소한 반면에 국제상업은행들의 차관단대출을 위시한 민간 자금 공여가 확대되면서 원칙의 포기조항은 채권자의 우려를 한결 덜어주었다고 하겠다.

5. 차관단대출
한국의 시중은행들에게 원칙이 관심사로 떠오른 계기는 1991년 구소련에 미화 10억 달러의 차관단대출 공여였다. 동년 3월과 11월에 각 5억 달러씩 공여했기에 두 건의 차관단대출계약서(계약서)가 작성되었는데, 두 계약서 제8조 (K)항의 핵심은 원칙의 포기였다.

채무자인 소련대외경제은행이 계약서 조건에 따른 원리금 상환에 실패하여 디폴트가 발생한다면 채권자인 한국의 시중은행들이 개시하는 채권 회수 법적 절차에서 소련이 피고로서 소송의 당사자가 된다. 소련이 다른 나라 법원에서 진행되는 소송의 당사자가 되겠다고 동의할 리 만무하다. 계약서에 관할법은 영국법으로 정해졌으므로 영국 법원이 원칙에 근거하여 채권자들이 제기한 소송 자체를 각하할 개연성이 상존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방지하고 채권자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계약서에 원칙의 포기 조항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K)항에서 원칙을 ‘immunity’라고만 불명확하게 표기하였는데 ‘sovereign immunity’로 정확히 표기했어야 뜻이 분명해진다. 물론 긴 문장보다는 ‘waiver of sovereign immunity’라는 단순하고 명료한 표기가 있었다면 그 뜻이 한결 더 분명했을 터이다.⁸⁾

6. 상식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칙은 진화하여 상거래에서 비록 주권국가라도 원칙의 적용이 배제되었다. 하물며 반인도적인 범죄에 원칙의 적용이 마땅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판결로써 20세기 후반 지구촌의 상식을 확인하였다. 특히 이 판결은 동북아와 동남아에서 각별히 주목하는 판결로 평가될 것이다.

국가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철칙은 동등과 상호 존중이다. 한⁕일 사이의 갈등도 이 철칙을 바탕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얽힌 문제에 법리다툼마저 추가되었다. 결국 외교적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2015년 12월 미국의 가중된 압력으로 한⁕일 간에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양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똑같이 분노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두 나라의 지도자가 대국적인 조치를 교환하지 않는 한 갈등 해소는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Michael Tomz, Ruputation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Princeton and Oxfo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7), p.158, p.192.
Jerome Roos, Why Not Default? (Princeton and Oxfo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9), pp.100.
William H. Wynne, State Insolvency and Foreign Bondholders (Washington D.C., Beard Books, 2000), pp.129~134.
2) Michael Tomz, 위 책, p.158.
3) Lex Rieffel, Restructuring Sovereign Debt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2003), p.12.
4) Jerome Roos, 앞 책, pp.104~105.
5) Éric Toussaint, The Debt System (Chicago, Haymarket Books, 2019), p.176).
6) Federico Sturzenegger and Jeromin Zettelmeyer, Debt Defaults and Lessons from a Decade of Crises (Cambridge, Massachusetts, London, England, The MIT Press, 2006), p.56.
7) 6)와 같음.
Karin Lissakers, Banks, Borrowers, and the Establishment (BasicBooks, 1991), p.174.
8) 한국산업은행 외, Loan Agreement, 1991. 3.30, p.16, 1991. 11.4, p.15.
(K)항의 앞 문장에 ‘governmental acts’라는 생소한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act of state’의 뜻으로 사용된 듯 보이나 확실하지 않으므로 논외로 한다. 뒷문장에 핵심인 원칙의 포기를 서약하는데 아래와 같다.
“⋯⋯ and the borrower will not be entitled to claim immunity for itself or any of its assets from suit, execution, attachment or other legal process in any proceedings taken in the USSR in relation to this Agre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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