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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효과(halo effect) [ 2020.08.31 ]

[뉴스재팬=포사단필]

1.
지난 6일 미국 외교계의 거물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세상을 떴다. 그는 포드(Gerald R. Ford) 행정부와 부시(George H. Bush)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이끌었고, 7개 행정부에 외교자문을 하면서 40년 가까이 미국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부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던 1991년 8월 모스코바에서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스코크로프트는 이 때 상황판단에 착오가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¹⁾

2.
1991년 6월 20일 매트록(Jack F. Matlock, Jr.) 주소미국대사는 포포프(Gavriil Popov) 모스코바 시장과 점심을 함께 했다. 매트록은 4년 임기를 마치고 8월 초 귀국 예정이었다.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실 때 포포프는 종이를 꺼내 휘갈겨 썼다.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 중이다. 우리는 옐친(Boris Yeltsin)에게 알려야만 한다.” 대사도 휘갈겨 썼다. “워싱턴에 메시지를 보내겠다. 주동자는 누구인가?” 시장은 몇 사람 이름을 적어 대사에게 밀었다. “파블로프, 크류츠코프, 예조프, 루키야노프.”

그 날 미국 방문 중인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 당선자 옐친은 10시에 부시 대통령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매트록은 베를린에 출장 중인 베이커 국무장관, 워싱턴의 스코크로프트 국가안보보좌관, 부시 대통령에게 시급히 보고하도록 부대사에게 지시했다.

그 날 이른 저녁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고르바초프를 만난 매트록 대사는 말했다. “대통령 각하, 부시 대통령께서 비록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매우 난감한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각하께 알려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한 루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인된 정보도 아닙니다. 각하를 물러나게 하려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며, 쿠데타는 언제라도, 어쩌면 이번 주 중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부시 대통령께 참으로 고맙다고 전하시오. 나는 때때로 부시 대통령과 내가 파트너라고 생각해왔는데 확실히 파트너군요. 대통령의 우려에 감사하오. 부시 대통령은 친구로서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을 해주셨소. 그렇지만 걱정 마시라고 전해주시오. 내가 모든 일은 잘 하고 있으니까요. 대사, 별일 없을 거요.”

7월 중 고르바초프는 바빴다. 그는 7일에 런던에서 열린 G-7 회의에 참석했다. 그에게 호의적인 대처 여사의 강력한 권고로 G-7이 그를 초청하였으나 기대했던 서방의 원조는 무산되었고, 그저 사진 한 장 찍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7월 29일 부시 대통령이 모스코바를 방문했다.

8월 4일, 7월을 분주히 보낸 고르바초프는 휴가차 크리미아로 떠났다.
8월 17일, 크류츠코프는 쿠데타 동조 인물들과 국가비상대책위원회(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표단을 크리미아로 보내 고르바초프가 직접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설득하되 거부하면 억류하고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계획했다.

8월 18일, 예정에 없는 대표단의 접견 요청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고르바초프는 KGB 의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모든 통신 수단이 먹통이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몰아내려는 작업이 진행 중임을 확실히 감지했다. 대표단은 3중 경계망을 통과하여 고르바초프를 만났으나 고르바초프는 위원회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연금되었다. 대표단은 모스코바로 돌아왔고, 밤 11시 부통령은 대통령의 건강문제로 헌법에 따라 8월 19일부터 소련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는 선언문에 떨리는 손으로 서명하였다.

8월 19일, 쿠데타가 터졌다. 타스 통신은 오전 5시 30분경 위원회의 국가 전권 장악을 보도했다. 제1호 명령으로 모든 정당, 단체의 파업과 가두시위를 금하고 언론을 검열하며 필요시 통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쿠데타 감행 주요 인물은 부통령 야나예프(Gennady Yanayev), ), 총리 파블로프(Valentin Pavlov), KGB 의장 크류츠코프(Vladimir Kryuchkov), 국방부 장관 예조프(Dmitri Yazov), 내무부 장관 푸고(Boris Pugo), 대통령 비서실장 볼딘(Valery Boldin) 등이었다. 모두 고르바초프가 신뢰해서 직접 정부 고위직에 앉힌 자들이었다.

3.
워싱턴. 국가안보보좌관 스코크로프트는 역사적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모스코바의 쿠데타는 성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역사적 경험에는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이 포함되겠다. 주도인물들로 볼 때 고르바초프는 여지없이 밀려나 과거의 인물로 사라질 것이 뻔해 보였다. 스코크로프트는 이 쿠데타를 불법적(illegal)이거나 부당(illegitimate)하거나 위헌적(unconstitutional)인 사태로 규정하지 않고 초헌법적(extraconstitutional)으로 규정하도록 권고했다. 따라서 8월 19일 오전에 발표한 부시 대통령의 첫 성명은 쿠데타의 성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듯 그간 고르바초프가 이룩한 공헌을 과거형으로 언급하고, 쿠데타 지도자들이 소련의 국제적 의무를 이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히면서 쿠데타를 ‘초헌법적’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은 이제 새로운 세력과 상대해야 되므로 애매한 외교적 수사를 구사함으로써 심각한 대결보다는 한 줄기 대화의 통로를 유지하겠다는 의도였으나 중대한 실수였다. 뉴욕 타임스도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가 실각했다(GORBACHEV OUSTED)고 보도했다. 뒤늦게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 19일 오후에 부시 대통령은 두 번째 성명에서 쿠데타를 불법적이고 위헌적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고르바초프 집권 6년 동안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로 소련 사회는 착실히 변화하였다. 쿠데타기도 세력은 이것을 가볍게 여겼다. 탱크에 올라선 옐친과 벨르이돔(White House)을 온몸으로 보호하기 위해 모스코바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사하로프 박사의 미망인과 전임 외무부 장관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도, 파리에서 황급히 귀국한 세계적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도 거기에 있었다. 더구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모스코바에 출동한 군 지휘관들이 시민을 향하여 총을 쏠 수 없다고 결단하였다. 특히 샤포시니코프(Yevgeny Shaposhnikov) 공군 총사령관은 쿠데타 세력이 저항세력의 본부인 벨르이돔을 공격하면 크렘린을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8월 21일 고르바초프는 모스코바로 귀환했다.

4.
매트록은 1995년 펴낸 책에서 스코크로프트의 판단을 네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맨 먼저 지적한 한 가지만 적는다. 매트록은 스코크로프트가 쿠데타가 성공할 것으로 본 주요한 근거는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지적하고, 그가 크렘린의 과거사에 집착한 나머지 이미 예전과는 다른 나라로 진화한 소련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되풀이할 줄로 오판했다고 비판했으며, 리더들이 쿠데타를 제대로 계획하지 못했다는 CIA의 분석을 CIA의 희망사항으로 간주하여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적시했다. 1991년의 소련은 크렘린의 동료들이 개혁을 시도하는 흐루시초프를 권좌에서 밀어낸 1964년의 소련과는 판이했다는 사실을 쿠데다 주도세력과 똑같이 스코크로프트 보좌관도 간과했다는 주장이었다.

‘역사적 경험’에 사로잡힌데 더하여 주동인물의 면면을 보면 쿠데타의 성공이 담보되었다고 판단할 만도 했다. 또한 미국 조야의 소련전문가들도 KGB와 군부가 원하는 것을 손아귀에 넣지 못한다고 본다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니 워싱턴에 끼친 크렘린의 후광효과는²⁾ 아주 유효했다.

쿠데타의 성패 여부가 혼미한 가운데 8월 20일 모스코바에서 가장 돋보인 존재는 벨르이돔을 에워싼 모스코바 시민들이었는데, 젊은이 못지않게 노년층도 많았고 여성이 남성만큼이나 다수였다. 나이 지긋한 한 여성은 벨르이돔으로 출발하면서 “우리는 오랜 기간 침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의 러시아 정부 지지는 특별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5.
수해와 태풍과 코로나19의 2차 유행으로 8월은 곤고했다. 들판의 농부는 속이 타는데 서울 아파트에는 10억 원 단위 뭉칫돈이 굴러다니고, 강남아파트의 후광효과는 수도권과 삼남에서 맹위를 떨친다.

여의도 건달들이 일을 하는지 마는지, 나라 살림살이가 어느 구석으로 내닫는지, 공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는지, 언론은 어찌 돼먹어서 기레기들이 기승을 부리는지, 어쩌다가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게 되었는지, 방역 비상 와중에 파업에 돌입한 의사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지, 검찰개혁은 다시 개검찰로 회귀하자는 것인지, ⋯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똘똘한 놈 한 채가 꿈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면 마땅히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시민정신으로 성숙되어야  우리는 후대에게 나라다운 나라를 물려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명이 새삼스러운 요즈음이다.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이 글은 Jack F. Matlock, Jr.의 Autopsy of an Empire (New York, Random House, 1995, pp.540-541, 578-594)에 의존하였다..
2) 전영규, 『돈잔치 빚잔치 말잔치』 (제일인쇄, 2009),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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