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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꼰대 [ 2019.12.31 ]

[뉴스재팬=포사단필]

1.
지난 11월 5일 오전, 국립중앙박물관 중•근세관(고려실, 조선실)의 해설을 듣고자 온 관람객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 한 사람뿐이었다. 관람객이 이렇게 단 한 사람인 경우에는 1시간 동안 고려•조선실의 해설을 다 듣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여 들을 수 있다고 안내한다. 그는 지리학을 공부하고 있다면서 조선실 해설을 원했다.

2,
몇몇 중요한 문화재를 돌아본 뒤 해설자와 관람객이 자매명문(自賣明文) 앞에 섰다. 이 문서는 1852년 10월 남편이 중병을 앓아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가 16냥에 자식 넷(1남3녀)을 노비로 매매하며 작성한 문서이다. 굶주림으로 생존이 어려워 자식은 물론이고 자신을 노비로 파는(自賣) 사례가 적잖았다는 설명에 젊은 관람객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거와 같군요.”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을 노비로 파는 19세기의 자매와 21세기 한국 대기업 취업이 동일하다는 뜻밖의 반응에 해설자가 토를 달고 나설 일은 아니었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간단히 답했다, 대기업에 취직하면 곧 대기업의 노예가 되는 거라고.

담합, 분식회계, 탈세, 하청업체 후려치기, 기타 등 빈번하고 다양한 대기업들의 기업범죄로 그 조직 구성원들이 조직의 부당한 요구에 노예 같이 굴종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터이다.

전에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다는 게 이십대들의 현실이”라는 주장¹⁾도 읽었고, 이십대들의 취업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만큼 어렵다는 점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해설 도중 청년 관람객에게서 지레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자존감을 상실한 채 취업이 바로 노예가 되는 거라고 자처하는 말을 들으니 찝찝했다.

3.
조선시대에 <소학>은 공•사 교육기관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아동교재였는데, 이황은 갓 즉위한 어린 선조에게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서 본바탕을 함양했기 때문에 <대학>에 먼저 격물치지를 말한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소학>을 읽지 않기 때문에 격물치지의 공효를 알지 못합니다.”²⁾

이후 200여 년이 흐른 뒤 영조는 한탄했다. “동몽으로서 교관(敎官)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는 <소학>을 읽도록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자는 지름길에 힘쓰고 근본에 힘쓰지 않기 때문에 부박(浮薄)하고 조경(躁競)하는 습성이 대부분 여기에서 연유한다 하겠으니, 한심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느냐?”³⁾

이황과 영조는 본바탕과 근본을 강조하였다. 이는 4서5경 같은 경서를 공부하기에 앞서 <소학>부터 가르쳐서 동몽들로 하여금 이상적인 인격의 밑바탕을 이루도록 해야 된다는 소학 선강(先講) 원칙⁴⁾의 확인이었다. 한마디로, 공부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주춧돌을 놓은 다음 기둥을 세움이 순리이다.

4.
민주적, 창의적, 비판적인 지성을 갖춘 시민의 육성이 21세기 교육의 목표라고 하겠다. 영조 이후 250년이 되어가는 오늘은 어떨까?

입시학원 종사자는 교육 현장을 이렇게 보여줬다. “지금과 같은 형식의 객관식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토론식 수업보다는 강의식 수업이 훨씬 좋다. … 일방적 강의식 수업을 통해서 비판적 사고력은 가질 수가 없다. … 창의력을 키울 수도 없다. … 자신의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수업시간에 자신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 대한민국 교실에서는 결코 자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는 필요 없다. … 질문은 불필요한 짓이다. … 생각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이 성적을 올리는 데 더 유리하다.”⁵⁾

5.
450여 년 전부터 본바탕과 근본의 함양을 무시하고 <대학>부터 외워대던 전통사회의 고약스러운 세태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양반들 사이에도 관직 점유를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다. 관직을 차지함과 동시에 그것을 지속하고 세습적으로 전승하기 위한 조치야말로 절대적인 과제가 되었다.⁶⁾

특정 대학의 입학이 지배층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자격증이 되고, 특정 대학•고교 출신자들이 지배집단 내에 카르텔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그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자원, 그리고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질서를 영속시키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그들의 카르텔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으로 내모는 학벌주의⁷⁾가 이 땅을 휩쓸고 있다.

인성 교육을 무시하고 점수로 줄을 세우는 한국 무한 경쟁 사회의 저류에 집을 지을 때 기둥부터 세우려했던 조선 후기 지배계층의 생태가 끈질지게 작동하며 공•사교육 현장에서 처절하게 되풀이 된다.

6.
학원은 학교를 밟아버렸다. 교육을 온통 대학입시에 종속시키는 메리토크라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기 때문에 비판적 사고 역량을 갖춘 민주시민 육성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에⁸⁾ 공감한다.

김동춘은 한국의 아이들과 대학생들은 사회에서 시민, 공인, 직업인, 엘리트로 살아가는 기본 덕목과 정신을 익힐 기회를 배우지 못한 채 사회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세상이 기성인들을 노예로 만들어도, 학교는 달라야 했다고 꼬집고, 일제 강점기 이후 100년 동안 한국에 진정한 '교육'은 없었기에 한국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노예적' 삶을 살았다⁹⁾고 신랄히 비판했다.

7.
빠르기만 했지 기술이 너무 부족했던 축구선수 손웅정은 부상으로 은퇴 후 “나 같은 선수로 안 만들려고 흥민이에게 기본기 연습을 죽도록 시켰다¹⁰⁾고 말했다. 그는 비록 기술이 부족한 선수였지만,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가르친 훌륭한 아버지이다.

해설자는 젊은 시절 두 아이 교육에 별달리 신경 쓰지 못했음에도 마치 사려 깊은 학부모였었다는 듯 청년 관람객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투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캐물은 우스꽝스러운 꼰대이다.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P.54.
2)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1567) 11월 4일.
3) 영조실록 120권 영조 49년(1773) 6월 4일.
4) 박연호, “『소학』의 현대적 계승은 가능한가?” 『韓國系譜硏究 6』 2016.12.
5) 송민수, 『어쩌다 우리는 괴물들을 키웠을까』 (들녘, 2017), pp.128-130. 생각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이 성적을 올리는 데 유리한 교육은 대학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이혜정의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다산에듀, 2014)를 참조하기 바람.
6) 진덕규,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지식산업사, 2003), p.577.
7) 김동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도서출판 길, 2007), p.409.
8) 장은주,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사회적 합의의 방향과 제도화의 과제,” 심성보 외, 『학교 민주시민교육의 세계적 동향과 과제』 (살림터, 2019), p.274.
9) 김동춘, 『대한민국은 어디로?』 (북인더갭, 2019), p.86, p.162.
10) 동아일보,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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