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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볼커를 애도하면서 [ 2019.12.18 ]

[뉴스재팬=포사단필]

1.
지난 8일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를 이끌었던 볼커(Paul A. Volcker Jr.) 전 의장이 타계했다. 그의 별명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다.

미국은 1970년대 거의 전반에 걸쳐 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으며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금리였다. 대다수 개발도상국(개도국)들은 경제개발 명목으로 헐값의 달러를 마구 차입하여 돈 잔치를 벌였다. 1979년 10월 볼커는 급격한 고금리 정책으로 전환하여 1980년대 초에 미국의 기준금리를 충격적인 21%까지 올렸다. 달러(US$) 자금을 잔뜩 차입한 지구촌은 곽란을 일으켰다. 그의 강력한 고금리 정책으로 1983년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3%대로 떨어졌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게 마련이다. 미국의 살인적 고금리는 1982년 8월 개도국의 외채위기(foreign debt crisis)를 촉발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누구도 1979년 10월이 국제금융의 획기적인 분수령이 될 줄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2.
개도국 외채위기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볼커 의장의 언명 두 가지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MBA problem) 등 대형 채무국들을 비롯한 대다수 개도채무국들의 외채 원리금 상환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대형 채권은행들, 특히 미국 대형은행들(money center banks)과 서유럽의 채권은행들은 당연히 돈줄을 바싹 조였다. 이로써 개도채무국들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했고, 대형 채권은행들은 막대한 부실여신에 따른 자산건전성 악화, 손익 악화로 위기에 봉착했다. 불량 채무자와 불량 채권은행의 악순환으로 맞물린 국제금융계는 진퇴양난의 교착상태에 빠졌다.

1982년 11월 볼커는 작심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형 채권은행들에게 개도채무국들이 숨은 쉬면서 현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금을 추가 공여하라고 강압하였다. 그는 신규 대출의 공여로 개도채무국들의 구조조정 과정이 촉진되고, 경제가 호전될 수 있으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제채무를 상환할 수 있게 된다면, 은행감독기관이 그 신규대출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언명했다.¹⁾ 볼커는 연방 준비은행이 대형채권은행들에게 신규 대출을 공여하지 않으면 해당은행을 검사하겠다고 위협했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들이 추가 대출(involuntary lending)을 제공하도록 밀어붙였다.

이로써 국제금융계의 곤경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채권은행들의 무모한 개도국 대출을 비판해온 코헨(Benjamin J. Cohen)은 볼커의 언명을 은행영업의 신중성에 대한 고려가 대형채무국들의 지급능력 유지에 우선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²⁾

3.
개도국 외채위기에 대한 볼커의 적극적 개입은 여기까지였는데, 위와 같은 그의 언명 뒤에 외채위기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위기관리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 “신규대출의 공여로 …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재채무를 상환할 수 있게 된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은 신규대출을 위한 공허한 명분이었을 뿐이다. 다수 개도채무국들이 원금 상환은 고사하고 이자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형편을 감안하면 어불성설이었다.

2) 신규대출금은 외채원리금 상환용으로 곧바로 채권은행으로 되돌아갔다. 즉 채무국의 외채는 신규대출 만큼 중가 했으나 그 자금은 채무국의 경제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부담만 더했을 뿐이었다. 지구촌의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되고 있었다.

3) 특히 자본금의 200% 이상 거액을 개도국 대출에 퍼부었던 미국의 대형 상업은행들은 신규대출•원리금 상환으로 시간을 벌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볼커의 언명에는 미국 금융계의 불안이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4) 신규대출•원리금 상환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면서 양 당사자의 상환조건 재협상(rescheduling)이 시작되었는데, 칼자루를 쥔 채권은행 주도의 일방적 협상이었다. 상환기간을 연장하고, 이율을 생색낼 만큼 깎아주고 나서 각종 수수료를 부과함과 동시에 채무국에게 여러 조건의 충족을 강요함으로써 리스케줄링도 채권은행의 수지맞는 장사가 되었다.

5) 다수의 다양한 리스케줄링에 IMF가 개입하여 채권은행을 측면지원하면서 도덕적 위해(moral hazard)를 유발하였다. 브레턴우드(Bretton Woods) 체제 붕괴 이후 존재감이 약화되었던 IMF가 일약 양측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링에 올랐으나 채권은행들의 앞잡이가 되어 빚을 대신 받아주는 해결사로 전락하였다.³⁾

6) 1980년대 개도국의 외채위기를 계기로 미•소 냉전 와중에서 줄타기로 재미를 보던 이른 바 제3세계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즘(ism)을 압도한 머니(money)의 위력이었다.

4.
1984년 볼커는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개도채무국들의 기본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경제개발 성공 여부는 지도층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유지하면서, 그 결과 국내저축을 자국 내에서 생산적으로 운용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다수 개도채무국들의 자본도피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경제개발 성공의 핵심 요소는 자본이나 기술보다 우선하여 지도자와 국민의 상호 신뢰라고 갈파하였다. 2020년대 진입을 앞두고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문제의 정곡을 찌른 한 세대 전 볼커의 충고를 존중했으면 좋겠다.⁴⁾

5.
볼커는 과감한 결단으로 미국의 고질 인플레이션을 퇴치하였고, 전체를 조감하는 균형감으로 국제금융의 물꼬를 텄으며, 개도채무국들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그들에게 귀중한 조언을 남겼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세계 경제대통령, 또는 20세기 최고의 중앙은행 총재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외채위기를 겪은 개도채무국들도 그를 그렇게 보는지는 잘 모르겠다.

볼커의 명복을 빈다.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November 29, 1982.
2) Frank E. Morris, “Disinflation and the Third World debt crisis,” World debt crisis, ed. Michael P. Claudon(Cambridge, Massachusetts, Ballinger Publishing Company, 1986), p.83, 재인용.
3) 해결사 구실에 비판이 거세지자 IMF는 외채에 허덕이는 개도채무국에 자금을 지원하되 채권은행들의 신규 지원이 없으면 IMF도 지원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4) 지도자와 국민 사이의 신뢰 회복이 절실한 나라가 그 나라들 뿐만은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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