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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적 질문 [ 2019.01.31 ]

[뉴스재팬=포사단필]
1.
지난해 하반기에 개봉된 영화 <국가부도의 날>로 전에 읽었던 글 가운데 나오는 ‘가설적 질문’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강석훈은 만약 냉전체제가 해체되지 않았었다면 한국이 외환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인가라는 가설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는 냉전체제 이후 각국 정부의 정책 방향이 과거 냉전기의 이데올로기 경쟁 중심에서 경제적 이해관계 극대화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한국이 외환유동성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술했다.¹⁾

당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었던 강경식과 차관이었던 강만수는 훗날 냉전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한국이 외환유동성위기를 당했다는 기록을 남겼다.²⁾

2.
1997년 무렵 지구촌에 중국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당시 미국은 지구촌의 독불장군으로 군림하였다. 20여 년이 경과한 요즈음 미국과 중국은 G2로 불린다. 미국의 단극체제는 막을 내렸고, 미•중의 패권경쟁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 지구촌에 21C 냉전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2011년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으로의 회귀(pivot)와 재균형(rebalancing)을 천명하였고 2017년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였다.³⁾ 중국은 남중국해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외쳐대며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제국에 자금을 뿌리면서 자원 확보와 세력권 형성에 열중한다.

2015년 9월 3일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북경 천안문 성루에서 시진핑 주석과 함께 열병식을 참관하였다. 사드(THAAD) 문제로 한국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로 전락했다. 중국의 경제보복을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거론하면서 방위비를 더 받아내려고 한국의 팔을 꺾는다.

미•중 사이의 21C 냉전이 심히 악화된 상황에서 2020년 겨울 한국에 1997년 위기와 동일한 외환유동성 위기가 곧 닥친다고 가정한다. 미국과 IMF는 어떤 조치들을 취할까? 국제금융계와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3.
21C 냉전체제에서 미국이 한국의 외환유동성 위기를 미연에 막아줄까? 그럴 개연성이 매우 희박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기본적 외교정책이 대외개입의 축소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세계경찰이니 민주주의 증진이니 미국 가치의 확산이니 하면서 국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주제 넘는 짓이었다고 비판했다. 한국이 외환유동성 위기를 당해도 미국이 21C 냉전체제를 의식하면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고작해야 위기의 사후관리일 개연성이 높다. 한국은 1997년 위기 때처럼 다시 IMF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할 수밖에 없다.

사후관리에 나선 미국 행정부 내에 갈등이 표출된다.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⁴⁾ 국내 경제계를 대변하는 재무부는 경제의 음주운전으로 위기를 자초한 한국에게 세계자본주의의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지못해 국무부와 국방부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는 정신 나간 나라를 맨입으로 도와줄 위인이 아니다. 거래본능이 작동한다. 그는 재무부에 한국을 무자비하게 두께도 없이 밟으라고, 그리하여 한국이 미국 발아래 코를 박고 엎어지도록 초전에 박살낸 다음 비로소 개입하라고 지시한다.

IMF는 미국의 충견으로서 한국 밟아버리기의 1등 공신이 됨으로써 대주주와 눈도장을 찍어 점점 희미해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다.

국제금융계는 ‘왼 노다지!’ 하면서 표정관리에 열중한다.
일본은 주근주근 어금니를 씹으면서 가만히 미국의 눈치를 살핀다. 설혹 일본이 독자적으로 한국을 돕겠다고 해도 한국 조야는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다. 일본이 꽃보다는 칼을 빼들고 현해탄을 건너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언급을 회피한다. 환구시보는 미 제국주의에 빌붙은 한국의 몰골을 과장하여 보도한다. 인민일보는 한국이 원한다면 중국이 기꺼이 돕겠다고 애드벌룬을 띄운다. 한국 조야는 중국의 지원 제안도 거부한다, 한국이 정말로 중국의 일부가 되어버린다는 우려 때문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침묵한다.

4.
국내 상황은?
1997년 이후 20여 년간 한국의 경세제민 운용능력이 향상되었는지, 대기업들이 담합과 분식과 갑질에서 탈피하여 정당한 상도를 걷고 있는지, 사회가 더 공정해졌는지, 교육이 바른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했는지, 이것들이 과연 어떤 형상으로 드러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네 가지는 확실하다.
공직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모닥불을 쬐면서 잘 먹고 잘 살 거다.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엔 실업자들이 넘쳐난다. 금모으기운동 같은 건 없다. 고위 경제관료 집단과 정치•경제학계는 2020년 외환유동성 위기에 관한 백서 한 쪽도 펴내지 못함으로써 1997년 위기 이후와 동일한 매춘부적 성향을 거듭 과시한다.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계획경제의 후퇴와 정부 역할의 변화,” 『탈 脫냉전사의 인식』 (한길사, 2012), pp.326-327.
2) 강경식,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김영사, 2011), p.185.
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삼성경제연구소, 2005), p.386.
3) 2016년 4월 27일 뉴욕 타임스는 미국 국익센터(The Center for National Interest)에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행한 외교정책에 대한 연설문을 게재하였다. 트럼프 후보는 이 자리에서 미국이 더욱 더 예측불가능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We must as a nation be more unpredictable) 세차례나 강조하였다. 이는 닉슨(R.Nixon) 전 대통령의 미친사람 이론(madman theory)과 맥을 같이 한다.
4) 1980년대 초 폴란드 외채위기 시에 미국 국무부는 폴란드를 적극 지원해야 된다고 주장한 반면 국방부는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대립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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