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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죄 [ 2018.04.30 ]

[뉴스재팬=포사단필] 봉직하던 은행의 검사부에서 일하던 J 검사역이 국외점포를 개설하고 관장하는 국외지점과장(이하 J 과장)으로 발령받아 다시 국제부로 옮긴 때는 1989년 7월이었다. 그 후 그는 국외지점으로 발령받아 국제부를 떠날 때까지 2년 동안 금융계 30년 근무기간 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¹⁾

당시의 관계 법규상 국외점포와 현지법인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은행감독원(이하 감독원)과 재무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우선 은행이 비공식적으로 양 기관과 구두로 사전 협의를 마친 다음, 현지에서의 진행상황을 고려하면서 내인가, 본인가를 거친 후 개설하였다. 현지에서는 그 나라 은행감독 당국의 인가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뉴욕현지법인 개설의 경우 1987년 12월에 재무부의 내인가를 받았으나 현지 감독 당국의 인가 지연으로 거의 3년만인 1990년 10월에야 개설하였다. 길어야 1년이면 완결되는 개설업무가 3년 가까이 걸린 이유는 한국계 은행의 미국 내 지점들과 현지법인들의 방만한 경영에 대한 미국 감독 당국의 강력한 견제 때문이었다. 캐나다현지법인 개설에도 2년 정도 소요되었다.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는 1979년 8월에 개설한 런던지점이 있었다. 은행에서는 유럽 대륙에의 진출을 도모하여 대상지역을 룩셈부르크로 정하고 사전협의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고약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전협의 과정에서 중앙은행을 무시하고 재무부와 먼저 사전협의를 마친 뒤에야 감독원과 사전협의를 시작했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국제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거듭거듭 해명했으나 오해는 풀리지 않았고, 국제업무 담당 상무이사는 물론 두 전무이사까지 감독원에 들어가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원래 오해란 해소되기 어려운 법이니, 한마디로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게 괘씸죄로 걸린 거였다.

중앙은행을 무시했든 아니면 오해였든 간에 양자의 관계가 이렇게 틀어지기 시작되면서 개설업무 실무 책임자인 J 과장의 동 업무 수행은 죽을 쑤기 시작했다.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죽이 맞아도 시원찮은 판에 시종일관 개죽을 쑤었다. 감독원 국제업무과 인가 담당 실무자 K 조사역은 저녁 굶은 시어미 상으로 내인가, 본인가, 현지 진행상황 보고 등등의 과정에서 사사건건 트집이고 어깃장을 놓았고, 그의 상급자 S 과장은 시중은행 과장 나부랭이는 눈에 안 보인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실무자는 가끔 국제부장에게 무슨 서류를 몇 시까지 보내달라고 전화를 했는데, J 과장은 아마도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였기에 부장에게 전화했으리라고 치부했다.

양자의 뒤틀린 관계 속에서 안팎으로 깨지면서 하여간에 본인가를 받아내야 되는 처지였기 때문에 J 과장은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심히 저자세를 취하고 감독원을 주살나게 드나들었다. 감독원은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기필코 인식시키고 시중은행의 버르장머리를 확실히 뜯어고치겠다는 듯 단단히 별렀던 반면에, 외국 은행의 자국 진출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룩셈부르크 당국은 매우 협조적이어서 현지의 인가업무는 신속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원의 본인가를 받았는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현지인가도 완결되었으니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하려면 밑천이 있어야 된다. 은행에서 룩셈부르크현지법인에게 자본금 5백만 달러를 보내야 되는데, 이 역시 감독원의 자본금 송금 허가가 필요했다. 본인가까지 했으면 자본금 송금은 자동적으로 허가해야 될 터이나 감독원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차일피일 미뤘다. 다 쑨 죽에 코풀기였다. 결국 현지에서 다급한 소식이 들려왔다. 개설준비위원이 현지 당국으로부터 빠른 시일 내에 자본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인가를 재고하겠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자본금 송금 허가 지연이야말로 되나 안 되나 끗발을 세우는 후진국 중앙은행의 구태의연한 작태라고 불만을 토했다.

감독원에 현지 당국의 경고 사실을 보고하고 실무자에게 조속한 송금 허가업무 처리를 요청했더니, K는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중앙은행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향후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약하는 국제부장 명의의 문서를 제출하라고 말했다. 송금 허가를 품의하면서 시말서와 유사한 그 문서를 보고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감독원으로서는 잘 잡은 타이밍이었겠으나 좀 야비했다. 그의 저 윗선에서 적어도 그러한 성격의 서류를 징구한 다음 송금을 허가하도록 지시했을 수도 있었겠고, 아니면 실무선에서 알아서 그러한 성격의 서류를 징구하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겠다.

부장에게 감독원의 요구 사항을 보고하니 별 말이 없었다. 난감하였다. 자본금 송금은 시급한데 감독원은 국제부장을 한 차례 확실하게 밟아주겠다고 시말서를 요구한다, 이사 승진을 바라보는 국제부장이 오해 때문에 비롯된 시말서를 쓸 리가 없다, 룩셈부르크현지법인 개설업무를 조속히 마무리하고 모스코바 사무소 개설 작업에 매달려야 하는데 ..... .

J 과장은 결국 한 쪽의 문서를 작성했다. 시말서를 낼 일은 아니었기에 제목을 <석명서(釋明書)>라고 했다. 의사소통상의 부주의로 물의를 야기하여 민망스러우며, 향후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유의하겠다는, 좀 애매하고 비석명적인 내용의 문서였다.

부장은 석명서를 읽다 말고 “당신, 뭐 이 따위를 디밀어!” 하면서 석명서를 방바닥에 날려버렸다.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어야 일이 돌아간다. 10분 쯤 지나 부장실에 들어가 석명서를 책상 위에 다시 놓으면서 찍어야 룩셈부르크현지법인이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했다. 부장은 말없이 결재했다.

국제부장 명의로 된 석명서를 제출받은 감독원이 그 내용에 만족하지는 않았을 터였으나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다는 듯 누그러졌다. 기실은 감독원도 그리 느긋한 입장은 아니었는데, 한국경제의 성장과 궤를 함께하면서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진출을 독려하고 지원해야 되는 중앙은행이 오해에서 유발된 지질한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거꾸로 시중은행의 발목을 잡고 버티는 모양이 졸렬했기 때문이었다.

룩셈부르크현지법인은 은행이 예정했던 일정대로 문을 열었다.²⁾

전영규 칼럼리스트

주.
1) 1989년 11월 시카고 지점 개설, 1990년 9월 싱가포르 사무소의 지점 승격, 1990년 10월 뉴욕현지법인 • 캐나다현지법인 개설, 1991년 7월 룩셈부르크 현지법인 개설하고, 모스코바 사무소 개설 업무 추진 중 J 과장은 국외지점 근무를 발령받아 국제부를 떠났다.
2) 1997년 닥친 외환위기로 위 지점과 현지법인 중 시카고지점, 캐나다조흥은행, 룩셈부르크조흥은행 등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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