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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 2015.09.30 ]

[뉴스재팬=포사단필]

1.
한반도의 위치는 참 절묘하고도 고약스럽다. 흔히 대륙세력이 해양으로 진출하는 도약대요 해양세력에게는 대륙 침투를 위한 교두보라고 말한다. 두 세력이 호시탐탐 노리며 교차하는 민감한 지역이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 소련은 앞서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대일본 참전 요구를 받고 대독전 종결 후 3개월 이내 참전을 약속했었고,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도 대일전 조기 참전 요구를 받은 터였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8월 15일부터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 정도는 자기네 차지가 되도록 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하였다.1) 실제로 소련은 선전포고 다음 날에 벌써 한반도의 북부에 진주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미군은 한반도에서 600 마일 떨어진 오키나와에 진출하였다. 8월 10일, 일본의 조기 항복 의사를 전달받은 미국은 서둘러 북위 38도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미소 병력의 진출한계선(line of limit)으로 결정하였다. 사실상의 한반도 분단이었다. 어느 쪽도 한반도를 다 차지하지 못하도록 단칼에 허리를 잘라서 양 세력의 영향권에 편입시킴으로써 극동에서 한반도 문제는 해결(problem solving)되었다.2) 6.25전쟁의 발발에서 정전까지의 과정을 보면 두 세력권의 치열한 싸움이 더욱 명백해진다.

10년 전인 2005년 가을 필자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수상이 인용한 아프리카 잔지바르 (Zanzibar)지역 스와힐리(Swahili) 사람들의 속담을 소개했었는데3) 오늘에도 그것을 되뇐다. “두 마리 코끼리가 싸워도 풀밭은 결딴나고, 두 코끼리가 사랑을 해도 풀밭은 역시 결딴난다.”

2.
지난 3일 오전 10시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북경 천안문 성루 에서 열병식을 참관하였다. 지구촌의 매스컴은 열병식 내용과 장면을 보도하기에 바빴고 특히 한국의 신문, 방송은 보도에 유난스러웠다. 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 여부를 놓고 여론이 양분되어 논의가 분분했으니 국내 매스컴의 호들갑도 이해되는 일이긴 했다.

60여 년 전 북한 김일성이 섰던 그 자리에 박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선 사진은 1948년 한국 정부 수립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의 지도자와 역대 남북한 지도자들이 보여준 장면 중에 가장 신선하고도 강력한 시각적 효과를 발산하였다.

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을 두고 요즈음까지도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는, 한국외교의 전방위적 확산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중국에 관해 뭘 모르는 물정 어둔 순진한 외교행보라는 부정적 평가로 어수선하다. 안미경중(安美經中), 말은 근사하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해도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미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미연합사령부로 전화질하여 어찌 하오리까 부족한 소인들을 지휘해달라고 매달렸다. 중국이 요구하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선산마저 팔아넘겨야 될 지경이 된다면 그것은 안미경중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사력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회”라고 말했다.4) 우리보다도 먼저 외국에서 한국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를 우려한다.5) 오늘 우리의 꼴은 마치 똥 싼 녀석이 잠방이 추썩거리듯 엉거주춤한 꼴이다.

3.
약 120년 전에도 조선 왕국이 극진히 사대하던 청 제국을 주요 대상으로 하여 이와 똑같이 극적인 시각적 효과를 과시한 장면이 있었다.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환궁 후 더욱 고조된 국민의 자주의식은 청의 후퇴와 열강세력의 균형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더불어 대한제국이 성립하는 배경이 되었다.”6) 고종은 10여 차례의 사양 끝에 여론에 못이겨 따른다는 식으로 칭제건을 재가하였다.7)

동양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존재는 중국의 황제(천자)뿐이었는데8) 고종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이를 하늘에 고하며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인 환구단(圜丘壇)9)을 중국 사신이 머물렀던 남별궁 자리에 세웠다. 한 연구자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함으로써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거듭나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하고자 했다.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행사였으며, 하나의 시각적인 이벤트였다.”고 논했다.10) 당시 이 시각적 이벤트에서 대한제국이 특히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청나라와 대등한 독립국가임을 강조한 각별한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고종과 그 신료들은 원구단 건립을 통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표상하고자 했던 것이다.11) 일본은 쾌재를 불렀다.12)

4.
그러나 환구단의 시각적 효과에는 허풍이 들어 있었다. 제국이 되어 ‘왕국’에서 ‘제국’으로 체제를 바꾸고 ‘왕’이 ‘황제’로 격상되는 것만으로도 획기적인 무엇인가 곧 이루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한 허세가 탱탱했다. 그러기에 독립협회측은 칭제논의에 냉담했으며, “윤치호는 열강의 국권침탈상황에서 이름만의 칭제는 무의미하고 중요한 것은 국가의 실질적인 힘이지 군주의 존호가 아니라고”13) 비판하였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황제의 권한을 절대화하고 민의를 외면한 채 독립협회를 탄압하고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 하는 등 시대의 요구에 역행한 퇴행적 정치 행태를 강화하였다. 구장복이 아닌 십이장복을 입고 구면류관이 아닌 십이면류관을 쓰더니 무한하고도 절대적인 황제의 권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 급진개혁파도 사라지고 온건개혁파도 그의 곁을 떠나 결국 고종은 측근정치에 매몰되었다.

비판적인 사가들은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는 황제에게 입법‧행정‧사법‧군사 등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보수반동화로 치달은 반면 황실이 주체가 되어 근대화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이는 민중수탈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결국 실패하여 식민지로 전락”되었다고 본다.14)

5.
광복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상황은 유사하다. 소련 대신 중국이 등장하여 이른 바 G2시대가 도래했다. 향후 G2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증대된다. 그 가치가 증대될수록 한반도를 확실히 제게 복속시키려는 G2의 손길이 집요해진다. 그 손길이 집요해질수록 한반도는 괴로워진다.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똘똘 뭉쳐도 모자란 판에 개혁은 나팔 소리만 요란하고 여야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가 천안문 성루에 서서 발산한 시각적 효과에도 환구단의 시각적 효과와 동일한 헛바람이 들어 있다. 박근혜 외교가 획기적인 무엇인가를 곧 이루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한 허세가 탱탱하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평화구상, DMZ 평화공원, 드레스덴 선언, 통일대박론 등 구호와 깃발은 요란하고 포장은 화사하지만 무엇 하나 똑바로 진척되는 게 없다. 암탉이 여기저기에 낳아 놓기만 한 달걀과도 같다.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천안문 성루 위에서 시진핑 주석과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왔을 뿐이다. 북한은 중국의 꽃놀이 패임을 재확인하였고, 미국은 콧방귀를 뀌면서 ‘그래서 니가 어쩔 건데?’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6.
1897년과 2015년에 한반도가 내외에서 과시한 시각적 효과에 묻은 허세를 보면서 해묵은 질문과 또 다시 만난다. “풀밭은 노상 당하고만 살아야 되는지, 풀밭 속에 저들로 하여금 밟으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만한 가시를 품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지, 무엇으로 풀밭의 가시를 삼아야 되는지, 그 가시를 기르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지.”

대한제국은 시대의 요청과 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국책 수행의 우선순위와 경중을 가리지 못한 와중에 성립된 사상누각과도 유사했다. 칭제건원 후 13년 만에 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특정국가의 독점적 지배를 방지하려면 불안정한 국제정세에 의존하기보다 철저한 내정개혁을 통하여 명실상부한 자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긴급하였다.”15)는 대한제국 성립에 대한 사가들의 평가는 오늘의 한반도에도 시사적이다.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William Manchester, American Caesar(New York, Dee Publishing Co., Inc., 1978), p.641. 소련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북반부의 점령을 고집했으니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고 미국이 전 일본을 점령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2) 이춘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 (나남출판, 2009), p.516.
3) 포사단필 “한반도”(2005. 11.22) 참조.
4) 이춘근, 앞 책, p.538.
5) 劉敏鎬, “美 의회, ‘朴槿惠의 親中정책보다 反日정책 더 불편,’” 월간조선, 2015. 9, pp.231-241.
6) 나애자, “대한제국의 권력구조와 광무개혁,” 강만길 외(편), 『한국사 11』 「근대민족의 형성<1>」 (한길사, 1995), p.150.
7) 위 글, pp.152-153.
8) 조선과는 달리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졌던 고려시대에는 왕이 원구에서 제사를 지냈다(肇祀圓丘)는 기록이 인종시책(仁宗諡冊)에 보인다(『고려시대를 가다』 국립중앙박물관, 2009, p.22).
9) 원구단(圜丘壇, 圓丘壇)과 환구단(圜丘壇)이 혼용되다가 2005년 문화재청에서 후자를 쓰기로 정하였다.
10) 목수현, “대한제국 원구단: 전통적 상징과 근대적 상징의 교차점,”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 4호, 2005, p.60.
11) 위 글, p.77.
12)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고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강력히 건의하였는데, 이것은 청의 종주권이 포기되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였다(목수현, 위 글, pp.62-63).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였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가장 먼저 승인하였음은 예정된 순서였다.
13) 나애자, 앞 글, p.152.
14) 위 글, p.185.
15) 위 글,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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