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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잃어가는 이중국적의 재일동포들 [ 2006.08.11 ]

일본에서 8월 15일은 패전기념일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미국에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진정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가리자는 뜬금없는 좌우 논쟁이 벌어진다. 일본에서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왜곡된다"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태평양 전사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8월 6일, 올해도 히로시마에서는 어김없이 평화 기원 모임이 열렸고,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가해자 미국'에 대한 침묵의 시위였다. 올해는 보기 드물게, 마치 속죄라도 하듯이 미국의 4대 TV채널에서 헤드라인 뉴스로 취급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는 없어

정작 태평양전쟁의 희생국이었던 한국과 중국에 관한 일본발, 미국발 뉴스는 찾을 길이 없다. 단지, 고이즈미 일본 수상이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단신 뉴스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측 가해자들이 합사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에는 아직도 태평양 전쟁의 희생자와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연행이라는 형식으로 도항해서 일본으로 건너온 한인들과 재일동포라 불리는 그들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의 두 배에 해당하는 70년 이상을 일본에서 살아오고 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의건 타의건 해방 후 귀국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정체성 위기'라는 새로운 문제를 안고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해마다 8월 15일이 되도,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추모행사는 한국, 일본,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재일동포의 정체성은 계속 점령당해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러브호텔을 경영하는 송씨(55·남)는 "우리 부모는 (일제에 의해서) 끌려 왔기 때문에, 미국이나 중국에 있는 동포들과는 다릅니다"라고 자신의 뿌리를 정의했다. 송씨는 재일동포 2세다. 젊었을 때는 동경 코쿠분지에 있는 조선대학의 수학 강사로 일했다. 즉, 그는 열성파 조총련이었다. "북한이 (경제적 파탄으로) 저렇게만 안 되었어도 우리는 민족주의자로서 북한 국적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며, 민단 소속 재일동포들 보다는 정체성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도 심각한 정체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북한 여권으로는 다른 나라는 물론 중국도 입국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후쿠오카에서 3대째 파친코를 경영하는 박씨(51·남)는 북경공항의 입국장에서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한다.

"우리가 민족학교를 다녔을 때는 중국은 동지의 국가로 배웠어요. 그런데 중국에 가보니 북조선 여권을 보고는 무조건 붙잡는 거예요." 말도 통하지 않고, 3~4시간 잡혀 있다가 손짓 발짓으로 겨우 풀려난 이후, 박씨는 귀국 후 바로 후쿠오카 한국 영사관을 찾아가서 온 가족의 국적을 한국으로 바꿔 버렸다.

국적 변경은 박씨뿐만 아니다. 2006년 5월호 <신동아>에 실린 민단 단장 신용상씨의 인터뷰 내용 중에 2002년부터 "매년 3~4000명씩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다"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국적이란 바로 북한 국적을 뜻한다.

문제는 한국 국적은 취득했지만, 북한 국적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한국인으로 거듭나기도, 일본인으로 귀화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정체성 문제는 이제부터라고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적 비애를 가지고 있는 조총련의 정치 경제적 기반

해방 후 조총련에 가입한 미귀향 재일동포 중 다수는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부류였다. 따라서 조총련이라는 단체는 경제적으로 불우한 동포들의 안전그물(safety net)인 셈이었다. 재일동포 중에는 연예인, 운동선수, 갈비집이나 파친코 경영자, 그리고 풍속점(한국의 룸살롱에 해당) 경영자가 많은 이유도 이러한 경제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은 갈비집이나 파친코, 여자는 풍속점을 운영하고, 아들은 운동선수, 딸은 가수인 가정이 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유별나게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가정에서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을 찾기가 더 쉬운 것은 민족적 비애나 다름없다.

조총련 소속의 동포들은 가난에 찌들려 해방 후에도 주로 일본의 차별계층인 부락민 (아직도 현존하는 일본의 천민 계급)이 집단 거주하는 부락민촌에서 생활했다. 부락민은 예부터 백정이 많아서 해방 후에도 도살업에 종사해왔다. 부락민이 소를 도살한뒤 버리는 창자를 받아다 구워먹었던 것이 바로 곱창구이다. 일본말로 호루모노 야키라고 하는데, 호루모노라는 말은 "버린다"라는 뜻이다. 이 호루모노를 구워서 팔기 시작한 것이 갈비집의 효시다.

부락민들은 재일동포들에게 소 창자를 공짜로 주었지만, 그들의 야쿠자 조직에 동포들을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이 야쿠자가 파친코에서 경품이나 상품을 돈으로 바꿔주는 일을 도맡아 했다.

조총련 조직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야쿠자와 부락민과 연계되어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였고, 조직원들의 가게 운영에 있어 뒤를 봐주었다. 가난과 차별이 일구어 낸 약자들의 상부상조 법칙이었던 것이다.

북한과 한국의 이중국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현실

조총련 조직원의 대다수가 파친코, 갈빗집, 풍속점을 운영하는 실정이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해서 원래 갖고 있던 북한 국적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회계업무와 세금문제 같은 아킬레스건은 조총련 조직 산하 상공회의소에서 해결해 준다.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 파동으로 갈비집이 잘 안됐을 때는 조총련계 연예인들을 동원해서 그곳에서 회식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가도록 하기도 했다.

쿠루메시에 사는 정씨(52·여)는 갈비집을 운영하면서 지역 여맹 위원장을 하고 있지만, 임시 대한민국 여권('린파스'라 부름)을 가지고 꿈에 그리던 부산을 방문했다. 더 이상 북한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이 국제적 현실이지만, 생업을 위해서는 선뜻 북한 여권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민단이나 주일본 한국대사관도 이중국적 현상에 대해서 관여치 않고 있다. 동경 민단의 한 관계자는 "민단 회비를 계속 내고 있으면, (북한 여권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한국 여권을 발급 받는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느슨한 민단의 정책으로 인해 최근 민단의 수뇌부가 조총련 출신으로 넘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이중국적으로 살아가는 임시방편도 점차 3세, 4세의 젊은 층들이 자라나면서 명맥 유지가 힘들어 지고 있다.

북한도, 한국도 아니면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의 정체성 문제는 정작 자신들이 아닌, 후세들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민족학교의 학생수가 격감하면서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았고, 이것은 비슷한 수의 동포 학생들이 일본학교를 택하고 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 한다. 이제 3세나 4세들은 한국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자식들을 민족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일본말 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최근에는 초중고는 민족학교, 대학과 대학원은 일본학교를 지망하는 동포들도 많아졌다.

세대 간의 대화는 당연히 일본 국적 취득으로 초점이 맞추어 진다. 벳부에서 2대째 갈비집을 경영하는 최씨(52·남)는 "한국을 두 번 갔다 왔지만, 말도 안통하고, 고향이라는 느낌은 못 받았다"며, "월드컵 때 우리 아이들은 일본을 응원했어요. 한-일전 축구나 WBC 야구를 해도 일본 편을 들죠"라고 강조한다. 최씨의 부인 정씨 (51·여)는 "(북한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에요. 일본이 우리 고향이에요. 빨리 일본 국적을 얻어야죠" 하면서, 자식들의 뜻을 따르겠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위의 도표에서도 말해주듯이, 비단 최씨 가정 만의 문제가 아니라, 매년 감소하고 있는 특별영주권자의 수치를 보아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많은 수의 재일동포들, 특히 전에는 조총련에 몸 담았던 동포들이 일본 국적을 다투어 취득하고 있는 것이다.

新 일본인들의 애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을 "신일본인"이라고 부른다. 벳부에서 자동차수리점을 하는 토쿠야마씨(가명·54·남)가 한 예다. 토쿠야마씨는 민족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에 한국말을 못한다. 그래도 한국에는 자주 간다. "이상한 것은 한국에 가면 나에게 모두 한국말로 해요. 일본인 가이드가 웃죠. 한국인들이 용케도 내가 한국사람인 걸 안다고 농담하죠."

일본 국적으로 바꿔도,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도, 호적에는 귀화한 사실을 정확히 적어 놓는 게 일본의 엄연한 현실이다.

후쿠오카에서 파친코를 경영하는 박씨는 "이럴 바에는 그냥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자식들과 같이 북한도,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4의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지금 뉴질랜드 영주권을 신청했고, 거기에 거액의 투자도 하고 있다.

일제가 남기고 간 분단의 비극과 재일동포의 분열, 그리고 일본인에 의한 차별과 비애가 어언 61주기를 맞고 있다. 기나긴 성상의 세월이 지나도 남북한은 통일을 못 이루고 있고, 자의든 타의든 돌아 올 수 없었던 미귀향 재일동포들은 북한도 한국도 일본도 그 어디에서도 뿌리박고 살 수 없었던, 나라 없는 또 다른 디아스포라(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이산'을 뜻한다)의 피해자로 역사에 각인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인규, 미국 UC 버클리 대학 경영학 교수

일본 뉴스 전문 매체-뉴스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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